저 자 : 정창권 경영학 박사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점심 대신에 김밥과 바나나를 매점에서 사다 먹는다. 줄 서는 것이 귀찮고 김밥과 바나나가 주는 편리함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는 게 병인지 나에게 편리함을 주고 있는 바나나를 볼 때마다 위기감을 느낀다. 바나나에 닥칠 운명이 심상찮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에 <네이처>발(發)로 바나나 마름병균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외 언론은 일제히 바나나 산업에 빨간불이 들어왔다고 대서특필 보도했었다. 바나나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외떡잎식물 생강 목 파초 과 파초 속에 속하는 바나나는 기원전 5,000년 전부터 인류가 재배하기 시작해서 인류 최초로 품종 개량한 식물일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처음에는 씨 많은 바나나 열매를 거뜰떠 보지 않고 뿌리를 캐 먹었는데 씨가 없는 돌연변이가 생기면서 과일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열대 개발도상국에 사는 4억 명 넘는 사람들이 날마다 섭취하는 칼로리의 3분의 1을 바나나에서 충당한다고 할 정도로 바나나는 주식(主食)으로 대접받고 있다. 그만큼 바나나는 우리 인류에게 고마운 존재다. 우리나라 역시 2012년 한 해에만 36만 7천 톤을 수입할 정도로 바나나는 지난 10년간 수입 과일 1위답게 늘 우리 옆에 있었다. 그런데 이 바나나에는 아픈 역사가 있고 갈수록 그 영향도 커질 전망이다.
유전적 다양성이 사라지면 멸종 위험 커져.
인기가 하늘을 찔렀던 바나나가 아주 미세한 곰팡이에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간편하면서 열량이 높은 과일이기 때문에 바나나의 인기가 갈수록 커지자 수출하기에 효율적인 품종을 찾기 시작했고 이것이 비극의 서막이 될 줄 처음에는 아무도 몰랐다..
다양한 실험을 통해 19세기 이후에 씨 없고 껍질이 두꺼워서 먹기에 좋고 장거리 수송에도 좋은 그로 미셸(Gros Michael) 품종이 만들어졌고 순식간에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에 이 품종은 지구 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공기와 같이 우리 곁에 항상 존재하는 미생물인 푸사리움 (Fusarium oxysporum) 곰팡이 때문이다. 이 곰팡이는 사막이나 열대지역 그리고 툰투라 지역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토양에서 기가막히게 환경에 적응하며 살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수많은 돌연변이를 만들어서 주어진 환경에 선택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파마나에서 사단이 벌어졌다. 유전적 정보가 미세하게 달라진 푸사리움 곰팡이 변종인 R1 균주가 그로 미셸 품종 줄기를 타고 올라가서 바나나를 고사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파나마 병이라고 불린다. 치명적인 바나나 마름병을 일으키는 이 균주는 빠른 속도로 다른 지역으로 퍼져서 그로 미셸 곰팡이를 싹쓸이 하게 된다. 이 사태를 두고 다양한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모든 전문가가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은 유전적 다양성이 사라진 생물이기 때문에 외부충격(질병)에 취약해져서 일시에 멸종 위기로 몰렸다는 점이다.
그런데 1970년대 말에 앞서 사라진 그로 미셸 품종을 대체할 기가 막힌 품종이 발견되었다. 그 주인공은 영국 캐번디시 공작의 정원사가 발견한 캐번디시 (Cavendish) 품종이었다. 선배 품종인 그로 미셸 품종을 한 방에 없애버린 R1 균주에 내성을 가진 이 기특한 품종은 1970년대 이후 산업화 고도화 과정에서 생긴 폭발적인 수요와 바나나를 신흥산업 주력 상품으로 선택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정책 덕분에 바나나 수출량은 늘어났고 재배면적은 더욱 넓어졌다. 바나나의 완벽한 부활이었다. 드라마틱한 품종의 변화를 나이 드신 분 중 일부만이 그 맛의 차이로 눈치챌 정도로 새로운 품종은 순식간에 전 세계에 퍼졌다.
아뿔싸.
갈수록 넓어지는 재배면적, 갈수록 적은 비용으로 안전하게 수송할 수 있는 물류시스템의 혁신, 믿을 건 바나나라며 적극적으로 수출 장려를 한 국가, 그리고 바나나가 주는 편리함에 길들어져 있는 나와 같은 전 세계 소비자들이 캐번디시 품종에 박수를 보내는 순간 그로 미셸 품종 멸종이 주는 교훈은 까마득히 잊혀졌다. 그런데, 바나나 주요 생산국 중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에서 푸사리움 곰팡이 변종인 TR4 균주가 만든 새로운 곰팡이병이 발견되었다. 이 발견이 작년 12월에 <네이처>지를 통해 발표했을 때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새로운 곰팡이에 의한 피해 속도는 그로 미셸 품종 피해 확산 속도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효율적인 산업형 재배 기술과 가장 효율적인 운송 시스템은 푸사리움 곰팡이의 새로운 균주인 TR4를 가장 효율적으로 전파하도록 길을 닦아준 셈이다. 수출에 효율적인 품종은 관리의 효율성을 위해서 독점이 되었고 정부의 정책이 추가되고 소비자의 수요가 끌어당기면서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되었다. 효율성을 위해서 매우 복잡한 시스템이 동원되는데 효율성이 높아질수록 의존도가 높아진다. 의존도가 높아지니 다른 대안을 마련할 필요를 못 느끼고 더욱 효율성 높은 품종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다가 외부의 작은 충격(곰팡이의 습격)에 힘없이 쓰러진 것이다.
유전적 다양성은 식량안보와 밀접한 인과관계.
UN 산하 단체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가 협의체(IPCC)가 7년 만에 2014년에 개정한 보고서를 보면 산업화 이전 기준으로 기온이 1℃ 상승하면 주요 식량자원 수확이 줄어든다고 한다. 미세한 기후 변화의 1차 피해자는 먹이사슬 최상부에 있는 인간이 아니다. 먹이사슬에서 낮은 위치에 있을수록 치명적인 피해를 받게 된다. 곰팡이는 돌연변이를 수시로 일으키지만 평소에는 그냥 도태되어서 거의 완벽한 생태계 균형을 만든다. 하지만 기후 변화가 생기면 각기 다른 돌연변이가 선택받는 가능성이 매우 높아져서 새로운 생태계로 발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생태계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생태계의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기후 변화에만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푸사리움 곰팡이의 변종을 만든 원인이 기후 변화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런 영향들이 작물에 미쳐서 수확량이 떨어진다는 전망은 우리를 긴장시킨다. 그리고 하버드대학 사무엘 마이어스 교수와 연구진은 2014년 6월 <네이처>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2050년의 기후로 예측된 환경을 만들어서 작물을 재배했더니 주요 영양분이 감소했다고 밝혔다. 이 두 가지 연구를 요약하면 가까운 미래에 주요 식량 작물의 수확량은 줄어들고 영양분은 더 나빠진다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이는 더 비싼 돈을 주고 구매해야 하는 중・하위층 계층과 개발도상국 국민 대다수다.
효율성과 복잡성 그리고 의존성과의 비극적인 밀월관계.
이제 인간이 만들어내는 시스템으로 눈을 돌려보자. 원자력은 우리 인류가 만든 최고 효율성이 높은 에너지다. 원자력 발전소를 만들는 과정은 이루 헤아릴수없이 복잡하다. 마치 바나나의 운명과 데자뷰를 이룬다. 국제원자력기구 정보사이트(IAEA PRIS) 11월 3일 자 업데이트된 자료에 따르면 중국에서 가동 중인 원자로는 22기고 27기가 건설 중이다. 우리나라는 23기가 가동 중이고, 일본은 48기가 가동 중이다. 이 정도면 원자력 중독이다. 원자력 에너지가 주는 달콤한 효율성에 중독될수록 대체 에너지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을 머리로 알면서도 몸이 안 따라가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전형적인 금단 현상이다. 갈수록 원전의 효율성은 높아지고 국가 발전에 효자 노릇을 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대체 에너지 회의록은 은근슬쩍 책상 밑으로 내려가게 된다. 그 결과가 후쿠시마 원전 사태다.
2014년 7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기술자로 1968년부터 근무해 온 오구라 시로(73세)가 ‘전(前) 원전 기술자가 알리고 싶은 진정한 두려움’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시스템의 복잡성이 만들어 내는 두려움을 잘 묘사하고 있다. 오구라는 “원전의 설계나 부품 제조는 수많은 기업과 기업 내 여러 부문의 분업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원전 전체를 혼자서 이해하는 기술자는 세계에 단 한 명도 없다"며 “원전의 복잡함이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고 있기 때문에 원전이 일으킬 수 있는 사고에 인간이 완전하게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이 원전의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지적했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책도 있기 마련. 다만 약간의 지식과 용기가 필요할 뿐.
바나나 멸종 위기의 해결책은 바나나에 있다. 그나마 다행으로 전 세계에서 생산된 바나나 중에서 수출되는 것은 12%밖에 되지 않는다. 즉, 수출용이 아닌 내수용 바나나들은 굳이 수출에 효율적일 필요가 없어서 더 다양한 품종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맞다 수출 상품성은 낮지만, 식용으로 쓸 수 있는 다양한 품종이 존재하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상품성'이라는 가치는 독점・효율성・경제성이라는 단어와 가까운 친구라는 점이다. 그래서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런 작물도 먹어보고 저런 작물도 먹어봐야 한다는 뜻이고, 운송의 ‘혜택’을 덜 받을 수 있는 주변의 작물, 토착 작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고, 이런 다양한 작물 생태계에 관심과 연구와 예산과 정책이 집중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오스트리아는 생물 다양성을 관리하기 위해서 1990년부터 종자 은행을 의미하는 노아의 방주 (Arche Noah)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효율성이 높다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고 오히려 위험할 수 있고, 이 위험을 해결하는 방법은 다양성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실천에 옮기는 것은 말처럼 절대로 쉽지 않다. 인간의 관성과 습관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효율성은 자본주의의 핵심 가치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이 개입한 환경・사회・경영・산업・경제・정치 등 다양한 분야의 생태계에서 ‘의지’를 가지고 효율성을 높이려고 한다는 점에서 자연 생태계의 효율성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연 생태계는 순환하는 먹이사슬을 통해 균형을 이루는 최고의 효율성을 갖추고 있지만, 인간이 개입한 생태계는 순환하는 먹이사슬이 아니므로 독점과 같은 쏠림 현상을 만든다.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따라서 다양성을 강조하고 실천하려면 우리의 삶에 깊이 뿌리 내린 자본주의의 효율성 논리와 대항한다는 결연한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서 효율성의 때를 벗기기 위해서는 꾸준한 일상생활에서의 작은 실천이 필요하다. 효율성만 쫓지 않고 다양성을 찾는 여정을 떠나야 한다. 때론 거친 밥도 먹어야 하고, 때로는 먹을 수 있는 우리 주위의 식자재에 관심을 가져봐야 하고, 때로는 편리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불편하고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걸어 다닐 용기가 필요하다. 이렇게 다양성에 대해 훈련을 할 때 식량 안보나 대체 에너지에 대한 논의가 좀 더 피부에 와 닿게 될 것이다.
지금 나는 이 원고를 쓰면서 바나나를 먹고 있다. 바나나를 염려하면서 바나나와 이별을 해야 한다는 원고를 쓰고 있으니 참 묘하다.
출처: 정창권. (2014) 효율성과 다양성의 충돌. Big Issue no.96, 2014 November 15, pp.28-30.